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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출신 이석영선생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전재산 처분해 독립운동에 투신
박현기 기자 | 승인 2020.01.22 16:31
이석영선생

남양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영석 이석영(漱石 李石榮, 1855~1934) 선생이 국가보훈처 선정 2020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이석영 선생은 대한민국의 최고의 갑부로‘신흥무관학교’설립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머나 먼 중국 상해에서 생을 마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전형이다.

선생은 백사 이항복(1556~1618)의 10대손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 6형제(이건영·이석영·이철영·이회영·이시영·이호영)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귤산 이유원에게 입양되어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임하려에서 살았으며,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일제에 의해 망하자 6형제와 함께 독립운동을 결의했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당시의 상황을 재연한 그림

그 해 12월 30일 화도읍 가곡리의 6,000여 석 토지와 가옥 등을 모두 처분하여 마련한 40만원(1969년 기준 약 600억원)을 가지고 6형제를 비롯한 온 가족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주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등을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11년 서간도에서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장교를 배출했다. 1920년 무장독립전쟁 특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큰 공헌을 한 독립군 중간 간부들의 대부분은 바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러한 신흥무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위하여 뒤에서 말없이 후원하며 전 재산을 희사한분이 바로 남양주의 자랑인 이석영 선생이다.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설립과 운영에 전 재산을 희사한 이석영 선생은 이후 북경과 심양 등을 전전하다가 1934년 2월 상해의 프랑스 조차지에서 두부로 연명하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 할 만한 인생이었다.

《한민(韓民)》1936년 5월25일자는 “이석영이 수많은 재산을 신흥무관학교에 쏟아 붓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란하게 생활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개식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의 풍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선생의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정부에서는 이석영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장남 이규준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후‘다물단’을 조직하여 일제 밀정을 처단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남양주시는 2019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이석영 선생을 추천했으며, 지난 날의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고자 조성하고 있는 홍유릉 전면부 역사공원에 ‘이석영 광장’을 조성하고 있다. 앞으로 우당 이회영(1867~1932), 성재 이시영(1868~1953)과 달리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석영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활동을 계속해서 펼쳐 나갈 예정이다.

국가보훈처는 올해 초에 한국광복군 건군 80주년과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접 100주년을 기념하여 2020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이석영 선생을 비롯하여 모두 16명을 선정, 발표했다.

박현기 기자  jcnews80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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